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장윤재 시집
SS Haus
,
SS Haus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장윤재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낮게 비추는 오후의 햇살에
세상이 멈추어 낯설어지는
그리하여 가슴 속에 어느새 가득찬 것을
내던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10
시 읽기
12
주홍빛 여름
13
박명의 시간
14
비 내리는 어느 날
15
작은 세상
17
어느 저녁
18
오후의 행진
19
20
22
25
26
그곳에는 늑대의 자손들이 있었다
27
Meadow
28
황금빛 오후
29
초여름
30
31
하늘의 색
32
36
Opening Scene
37
38
유일성
39
Closing Scene
40
41
42
43
잔디밭, 오후의 가을
목차
44
슬픈 창가
46
일부러 길을 잘못 든 것이다
48
겨울 달
50
51
수채화, 유화
52
53
바빌론
54
노르웨이의 숲
55
전시회
56
Matisse
58
빛과 그림자
59
벽과 빛
60
61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62
64
6월 26일
66
감각적 기억
67
68
69
사랑의 칵테일
70
찬란함
72
73
지나치다 보니
74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10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11
시를 읽는 것은 파도를 마주하는 일이다.
밀려오는 파도에 뒤덮히지 않으려면
시를 찬찬히 뜯어 읽어보아야 한다.
읽고, 또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곱씹으며 시를 갈갈이 발겨 흡수하고 나면 파도는
내 안에 스며들어 잔잔한 시냇물이 되어
끝없이 마음 속을
흐를 것이다.
시 읽기
그런데도 나는 시를 후루룩 들이마시기로 한다.
크고 푸른 어두운 파도에 뒤덮히거든,
그 끝을 모를 심연에 빠져들거든,
내 마음 깊은 시냇물을 넘어
그 아래 숨은 자갈밭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
시를 읽는 것은 파도를 마주하는 일이다.
파도에 뒤덮혀,
벅차오르는 감정에 빠져,
거센 물결에 휩쓸려,
아득한 바다에 잠기는 일이다.
으스러진 과육
태양 아래 오렌지빛으로 빛나던 열대과는
그날 저녁 으깨져 과즙 웅덩이를 이룬 채
인도에 널부러져있었다.
아삭한 여름 밤
짙은 녹색의 잎들 아래
산산조각 난 과육
주홍빛 여름 박명의 시간
해는 졌지만
하늘은 여전히 파란
그 찰나의 푸르스름한 시간
구름이 붓으로 휘갈긴 듯
세상을 획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그 묘한 박명(薄明)의 시간
14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15
열대우림은 거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우거진 풀과 나뭇잎
그 뒤에 길게 뻗은 곧은 나무 줄기 하나.
그 너머의 어둠.
어둠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함이 느껴졌다.
비가 무섭게 쏟아지며
열대우림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묵직한 습기가 나무들을 감쌌다.
그는 우비를 끌어 당기고 비 내리는 길을 걸었다.
새벽 7시, 아침이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해가 어둑하니 땅거미가 깔린 시간에
운전면허연습장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막이 내리고 쓸쓸히 남은 무대 위 세트
불이 꺼진 노란 신호등들과
구불구불 좌회전하는 좁은 도로
사이사이 잘 정돈된 잔디와
고요를 메우는 풀벌레 소리
모두가 떠난 도시에 홀로 남겨져
대로 한복판을 걸어가는 기분을 만끽한다.
텅 빈 세상 한가운데
외로이 춤추는 팔다리에 몸을 맡긴다.
작은 세상
너에게 17
어느 저녁
하늘을 노을색으로 물들이던 태양
어느새 산 너머로 사라져 남기고 간
우거진 나무들의 실루엣과
주홍빛 그을음의 여운
오후의 노을을 여행하던 낡은 비행기 두 대
능선을 나란히 넘고
해진 신발을 끌며 나는 이 저녁을 배회한다
적막한 밤공기를 흐르는
피아노 음들 사이로
드넓은 외계 바다들을 뽐내는 은빛 광채
가을 중턱의 큼직한 보름달이 밝다
18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19
도열한 나무들이
길을 따라 늘어지고
낮은 건물의 벽돌에
햇살이 드리운다
새가 지저귄다
노을의 노란 빛이
나무들을 무대마냥 비춘다
때이른 단풍 같은 노오란 빛
여유로운 오후, 모두가 줄지어 걸어간다
오후의 행진 설산
창을 열고 몸을 내밀자
눈부신 겨울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하이얀 눈으로 가득한 설산은
겨울햇살에 환하게 빛난다
저 멀리 산에서부터
요코
1
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볼을 발갛게 붉히는 시린 바람과,
눈이 부신 드넓은 설원에
정신이 아득해져
눈을 잠시 감고 겨울을 크게 들이마셔본다.
모든 게 멈추어 찬란하게 빛나는 겨울산,
이 무(無)의 세상에서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다.
20 나의 유일한 독자,
함박눈 내리는 밤에
차를 몰고 달린 산길은
폭신한 눈으로 온통 뒤덮혀있었다
창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듯 눈송이들은
가로등의 불빛 아래 찰나의 순간에 머무른다
그 짧은 순간에 가로등의 노란 불빛은
눈이 소복히 쌓인 둥근 소나무와
세상을 가득 메운 눈송이들을
밝게 비추어 한 폭의 무대에 멈추어두었다
설야
아무도 지나간 적 없는
눈이불을 밟고
지나간 우리의 차 뒤에는
새하얀 타이어 자국이 곧게 남았다
잠시 멈춘 차 안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눈송이들을 보며
나는 차분하게 유디트
2
를 떠올렸다
폭설 속 차에 갇힌 유디트가 물고 있던 사탕과
제설차를 타고 영영 떠나간
유디트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22 나의 유일한 독자,
두 나무는 언덕 아래에 나란히 서있었다
언덕 가득한 흙과 낙엽 사이에 숨어
춥고 초라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어제 아침,
목련꽃이 나무를 가득 뒤덮었다
송이송이 방울진 하얀 망울들에
두 나무가 한발짝 걸어나왔다
잎이 피지 않은 고동색 나뭇가지를
하얀 목련꽃이 가장 아름답게 수놓았다
아, 나무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었다
나무는 봄이었다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나무
너에게 25
선선해진 바람과 길어진 낮,
아직 잎이 피어나지 않은 앙상한 나무들
그 사이의 모순은
산기슭에 묘한 전운을 불러냈다.
사슴 떼가 유유히 풀을 뜯더니
비탈길을 내달려 사라져버렸다.
낮은 그루터기 서너 개만이 남아
그 적막을 지켰다.
초봄
26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27
어둑한 먹구름 아래 역사가 잉태한
억센 들판을 내달리는 그들이 있었다
강한 네 다리는 유연하게 땅을 박차고
온 몸이 에너지로 박동하는 그들은
한 폭의 수채화를 달린다
아, 자연이여 그대는 목도하였는가
묵직한 잿빛 하늘 아래
태초의 생명력이 한순간 폭발하고 있음을
늑대의 자손들이 아직 그대 들판 위에 건재함을
그곳에는 늑대의 자손들이 있었다
한 때는 잔디구장이었을 축구장은
풀이 울창하게 자란 들판이 되었다.
해가 뜨기 시작한 들판,
미국 동부 산맥 중턱에서나 볼,
프레리 독이 고개를 내밀어 볼 것만 같은,
듬성 듬성 얕은 물 웅덩이가 패여 있는,
아침의 길게 늘어진 햇살이 웅덩이에 반사돼
눈을 부시게 하는.
Meadow
28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29
창가에 기댄 채 나는
낡은 버스의 널찍한 앞유리창이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버스 위로 무성한 나뭇잎들이 빠르게 스쳐가며
그 사이사이 틈새로
황금빛 오후의 태양이 불규칙하게 번뜩였다
홀로 마무리하는 하루의 따뜻한 외로움
기억할 수 없는 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
아득하니 빠져드는 향수병
온 몸을 가득 메운 음악과
가슴 벅차게 아름다운 순간을
나는 선명히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금빛 오후
선명해진 나뭇잎의 초록과
눈부시게 빛나는 오월의 태양은,
잊고 있던 온기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뒷목이 새까맣게 그을렸던 지난 여름을,
매미들이 노래하던 그 푸르던 시절을
잰걸음으로 길을 질러가는 까치와
그림자 길게 드리운 들판을 흘러가는 샛물이
어느새 한 해의 절반이 지났음을 알린다
초여름
30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31
천둥 소리가 크게 두어 번 울리더니
비가 투둑 투둑
땅에 작고 굵은 점들을 남기기 시작한다.
우의를 입었다.
천둥은 큰 기침을 내뱉더니
어마어마한 비를 쏟아 부었다.
바지와 신발, 그 안의 양말이 흠뻑 젖어버렸다.
식당에 도착하자
비가 갑작스레 그쳤다.
꿈 같은 대 폭우.
1
난생 처음 보는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이불에서 삐져나온 작고 둥근 아기주먹만한 솜들이
하늘을 감쌌다.
빼곡히 차있는 솜들 틈새로
사이사이 푸른 하늘이 삐져나왔다.
하얀 솜뭉치들이 높은 가을 하늘을 따뜻히 안아주었다.
온 세상이 이불 안에 웅크려 잠들었다.
2
이 곳의 하늘은 여러 색의 향연이다
보랏빛부터 핑크빛 파란 하늘까지
낮게 펼치어진 산맥 위로
누군가
파스텔을 번져두었다
그제서야 침엽수들은 그 검은 윤곽을 드러냈다
하늘의 색
32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33
1
새벽부터 안개가 온 산을 뒤덮었다.
짙은 습기가
목젓에 내리앉아
모든 형태의 정신을
짓눌러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 무겁고 습한 기운으로
온 세상을 덮어버리거라
안개
2
오늘도 안개가 세상을 뒤덮었다.
아, 하지만 안개는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는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를 숨기고 어루만져주는
자연의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붉은 폭력은
그 짙은 안개를 끝내
뚫지 못했다.
34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35
3
안개보다는 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눈 앞에 펼쳐진 몽롱한 꿈.
꿈 속으로 우리는 걸어 들어간다.
대연병장은 거대한 사막의 입구가 되었다.
사막 바람이 모래를 쓸어 담아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둔덕으로 옮겨 둔다.
끝이 없는 안개의 꿈.
36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37
태양은 작열하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뜨겁게 달궜다
열기는 그녀의 시야를 뿌옇게 흐리고,
머리를 아득하게 채웠다
지금 그녀가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고 있음은 분명했다
다만 초점을 잃은 안구가
앞을 보기를 거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앞에 끝없이 펼쳐진 뜨거운 타르 덩어리가
그녀의 온 감각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여기가 어디인지,
그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환청이
어느덧 그녀의 귓가에 선명히 들리기 시작했다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그녀를 휘감았다
필사적으로 팔과 다리를 흔들며 내달렸지만
목소리들은 점점 커졌다
그것은 더 이상 목소리가 아니었다
웅웅거리는 북소리가 그녀의 온 정신을 메웠다
그 북소리는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북소리였으며
일사분란한 전사들의 북소리였다
우리 모두의 북소리였다
Opening Scene
가을 그 부패의 계절 속에서 나는 죽어간다.
썩은 은행 내음이 온 숲에 진동하고
푸르름을 잃은 채 말라비틀어진 땅에는
나뭇잎 시체들이 즐비하다.
검은 군홧발 밑에서 시체들이 아스라진다.
이 죽음의 계절을 나는 살아간다.
가을
38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39
유일성
삶은
고치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삶이 아닌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시간의 일방향성이 부여한 유일함.
손댈 수 없는,
바꿀 수 없는 시간은
그래서 추억이 되고
그래서 아름답다.
너와의 시간도 그 필멸적 결말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Closing Scene
그 순간 나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차디찬 말들은
수없이 한 마음 속 준비들이 무색하게
나를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렸다.
그녀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렀다.
내 눈을 피하는 그녀에게 울먹였다.
“앞으로도 평생 너를 잊지 않을게”
그녀는 아무말 없이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조급한 발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가던 그녀를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나의 첫사랑이었다.
나의 첫이별이었다.
40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41
조명
사무실의 천장에는 하얀 직사각형 모양의 led 등들이 정확
한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불과 몇 주전에, 사람들이 갑작스
레 들이닥쳐 설치하고 간 최신식 조명이었다. 수십 개의 네
모들은 마치 아주 약간의 음영조차 살려둘 생각이 없는 듯,
사무실을 모조리 빛으로 가득 채웠다.
그 허옇디 허연 폭력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내리쬐는 밝음으로부터 몸을 조금이라도 숨겨줄 그늘
을 찾아 헤맸지만 그런 그늘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
다. 옥죄어오는 밝음에 J의 시신경은 강하게 박동질하며 편
두통을 호소했다. 눈을 감아보았지만, 온통 붉게 변한 세상
은 끝없이 그의 정신을 방해했다. 한껏 팽창한 혈관들이 그
의 관자놀이를 불규칙적으로 짓눌렀다.
그는 포근한 어둠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당장에라도 달려
가 그 칠흑을 마음껏 부비고 껴안고 싶었다. 이 깨질 듯한
편두통을 멈춰줄, 모든 것을 꿰뚫고야마는 이 백광을 덮어
줄 완연한 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
그 희망을 향해 그는 있는 힘껏 내달렸다.
빗물에 눌려
어느덧 진흙 속에 침전한다
세상에 수직으로 돌진하는 빗물에
모든 것이 꿰뚫리고 있다
웃음도 활기도 대화도
빗줄기의 엄중한 규칙 속에서
침묵으로 땅에 파묻힌다
그리고 나는 서있다
빗속을 홀로 걷는다는 것은
비가 부수지 못한
단 하나의 숭고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흙탕물에 두 발을 내리박고
우뚝 맞서는 일
그 외로움을 견뎌내는 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일
빗물
42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43
나를 가득 휘감는 열망
목표를 정한 포식자 주위로 편협한 정적이 흐른다
경주마의 눈 양 옆에는 가리개가 있다
앞챙이 유난히 긴 모자를 푹 눌러 쓴다
딱히 햇빛이 강해서는 아니다
총성과 함께
말발굽 소리가 원형 트랙에 울려펴진다
눈이 시린 하늘을 오래 보았더니
파란 점들이 떠다닌다
하얀 구름과 파란 점들
꿈틀거리며 희미해가는 세상 아래
오랜만에 독대한 하늘
멈칫하는 법을 기억해낸 하루
뜨거운 오후의 태양 아래
기절하듯 누워본다
나는 그 아래 구석진 그림자
목 밑으로 연결된 몸통
햇빛을 받아 달궈진 피부
잃어버린 균형감각이
풀 바다 위의 돌섬에 일렁인다
등에 닿은 차가운 돌
이 외로운 반석에 의지해
나는 하늘을 마주한다
질주 잔디밭, 오후의 가을
44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45
창가에 앉아 오후의 대학로를 구경하며
이러한 문장에 대해 혼자 생각해본다
행복과 글을 적는 일은 서로 반대관계에 있어
동시에 참이 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적인 시선과 감정들은
철저히 외로워진 자아 위로 피어난다
어떤 감각에도 반응하지 못한 채
무겁게 가라앉은 심장의 정적을 배경으로
주변 세상이 느리게 흘러들어올 때
살풍경한 장면들은
가장 평범한 하루에도 자극적인 감각으로 변해
고요한 심장을 깊숙히 찌른다
검붉은 글자들이 종이 위로 뚝뚝 새어나올 때까지
슬픈 창가
사고의 혈을 흘릴 준비가 돼있지 않은 심장은
필히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다
행복한 심장일 것이다
유리 너머로 아름다운 심장들이 지나간다
문득 창에 비친 붉은색이 선명하다
어느 나른한 오후,
심장 하나가 스스로를 찔러죽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46 나의 유일한 독자,
일부러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몽환적인 음악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유독 지치는 하루였을까
도무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런 날이었을 뿐이다
단골집의 순대국밥에서 비릿내가 났던 저녁,
그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누군가는 그를
바짝 말라버린 시냇가 갓길에서 보았다
다른 누구는
어둠에 뒤덮힌 정자에서 피어오르던
그의 담배연기를 보았다
일부러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생전 피지 않던 담배를 피고 있었다니
소문은 믿을 게 되지 못한다.
그가 길을 잃었다니
그것도 집 바로 앞 골목길에서.
컴컴한 밤이 내리고 가로등빛이 희미한 새벽,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산자락에 잠길 때즈음
느릿한 걸음걸이로 그는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발을 끌며 뒤돌아보지 않고
세상을 떠나갔다
집집마다 굴뚝 희미한 연기자락을 등진 그를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다.
48 나의 유일한 독자,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려
나뭇잎들을 뱉어냈다.
추위와 함께 찾아온 십이월
낮이 짧아져 일찍이 어두워진
이른 저녁
바람이 불현듯 멎어
남색의 고요한 하늘에
나무가 섬세한 가지들을
살포시 그려냈다.
달 한 조각이
가느다란 그림자들 사이에
어느새 사뿐히 자리잡은
한 폭의 겨울 하늘
겨울 달
50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51
사랑에 눈이 멀었던 적이 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에 빠져
있는 힘껏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떠나갔다.
아, 나는 이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구역질 날만큼 선명하게 보인다.
미적지근하게 지루한 이 진실을
나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아, 사랑이여 다시 내 눈을 멀게 해다오
내 눈을 멀게 하고
내 기억을 모두 지워주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빠져들 수 있도록
이 역한 진실을 다시는 모를 수 있도록
다시 있는 힘껏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맹인 수채화, 유화
만난다는 것은,
아주 작은 교집합으로부터도 시작한다.
종이에 떨어진 두 물감 웅덩이가 퍼지다가
서로에게 닿는 순간 만남은 시작된다.
우연한 만남, 짧지만 인상적이었던 눈맞춤,
설레는 몸짓.
그 작고도 별 것 아닌 접촉으로 둘은 인연이 된다.
웃고 대화하며 행복하게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것은,
함께 뒤섞인 채 굳은 아름다운 색을 끊어내는 일이다.
두 사람이 뒤돌아서서 쉽게 떠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게 인연이 툭, 끊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련만,
둘은 끝내 떼어내지 못한 상대의 일부를 지닌 채
서로를 서로에게서 찢어내야 한다.
고통스럽고 서글프게.
그리고 상대의 빛깔이 희미해져갈 때즈음
다시 새로운 물감과 우연히 닿고
또 하나의 인연이 시작될 테다.
52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53
불멸
글쓰고 또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행위도
결국은 불멸을 위한 것이다.
받은 인상, 번뜩이듯 지나가는 생각들이
불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지금 밤에 어두운 공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모두 마찬가지이다.
"불멸에 대한 내 생각이 불멸하기를 바란다"
광란의 파티는
그녀의 눈물 한 방울로 완성되었고
광야의 첫키스는
그의 어깨에 날아든 나비의 날개짓과
외로이 울린 권총의 총성으로 절정했다
야하게 빛나던 트럼펫의 금관이
검은 가루로 더럽혀질 무렵
연주자는 무대를 떠났다
파티는 지하 속으로
배우는 필름 속으로
그렇게 우리는 오랜 추억 속에 기록된다.
바빌론
3
54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55
첫 페이지를 가볍게 훑고
절로 지어진 미소
그 미소를 간직하고 싶어져
얼른 덮어버린 기대감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뒤
다시 첫 문장부터 읽어나가본다
노르웨이의 숲
4
전시회
1
전시회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한 폭의 직사각형 종이 안에 담긴
선과 모양과 색을 좋아한다.
그 선과 모양과 색이 한 데 모여
주는 시각적 인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다.
2
사진에 담긴 피사체는
그 사각형 테두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작가가 그것을 카메라 프레임 속에
의도적으로 담는 순간
사물은 재탄생하는 것이다.
빛의 각도, 배치의 조화, 색감을 통해
피사체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오로지 그 불공정한 시선 속에서만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진전에 가만히 서서
작가들의 편협하고 폭력적인 시선이
뒤틀어놓은 아름다운 세상을 감상한다.
56 나의 유일한 독자,
1
고작 선 일곱 여덟 개로 그려진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하나의 사람. 그 삶이 수 개의 선으로 응축되어
마티즈의 그림이 되었다.
나는 고작 일곱의 선을 보았을 뿐이지만,
나는 그녀를 보았다.
Matisse
2
단 하나의 스트로크로 완성한 입술은
오로지 그녀의 것이었고
그녀 그 자체였다
그 선은 그녀의 인생을 따라
가볍게 휘어지고 무겁게 늘어져
되돌아오고 굽어지며
그녀가 되었다.
58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59
나뭇결을 따라 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곧게 정렬된 나무 창틀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회백색의 벽 아래 화병이 하나 서있다
화병에 담겨있던 잔잔한 어둠
찰나의 순간
빛이 유려한 곡면의 안을 채웠다
빛과 그림자
정갈하게 뻗은 나무 격자들이 사이사이 빛을 내어주어
안과 밖은 빛과 나무로 서로 유연하게 흐른다.
길쭉한 그림자 여럿이 회백색 벽에 나란하다.
벽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까글거리는 질감
묵직하지만 부드러운 호두나무의 결
손끝에서 느껴지는 동양의 정취
그 차분한 아름다움은 작은 나무선반과
그 위에 놓인 도자기의 단단한 유려함에서 마무리된다.
가는 선들이 섬세하게 도자기를 둘러싸고
온 힘을 다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날아오르려 하지만
도자기의 입이 살며시 다물어 안에 가득 머물러두었다.
벽과 빛
60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61
웃음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혹은 웃기 직전의 밝게 빛나는
웃음기 가득한 눈을 떠올린다.
나는 남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5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만약 촛불을 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어두움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나짐 히크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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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사이에서
은은하고 부드럽게
때로는, 붉게 일렁이며
빛나고 있는 우리의 촛불
매일 우리는 번갈아
밤을 지새우며
촛불을 보살핀다.
촛불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가 함께
오래도록 춤출 수 있도록.
62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63
궁금증은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샘솟는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말이다.
길을 걷다가 지나친
가게 이름의 의미가 궁금해지기도 하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눈에 들어온 가로등을 왜 저렇게 디자인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호기심의 파도는
내 가장 강력한 지적 동기이다.
물음표를 느낌표로,
느낌표를 다시 물음표로 이어나가며
드넓은 세상을 나라는 그물로 끌어안아본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바다로 나아가다보면
참 많은 것들을 내 그물 안에 담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정작
내 그물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용을 쓰고
배의 난간 너머로 그물의 모습을 보려고 해도
수면 밑에 깊이 가라앉아 도통 보이지를 않게 된다.
평생동안 내 사고의 침(針)은
나를 가리킬 줄을 몰랐던 것이다.
항해
내가 마침내 거울 앞에 설 줄 알게 되었을 때즈음,
나를 완성시키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녀의 침(針)은 두터운 낚시줄처럼
자신의 거울 안으로 깊이 늘여져있었다.
바다를 품을 넓은 그물이 아닌 이를테면
바다의 모래바닥을 스칠 그런 낚시줄 말이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거울의 차디찬 유리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내 다른 손을 펼쳐 긴 낚시줄이 연결된
낚싯대 하나를 쥐어주었다.
내 배는 지금 그녀의 배와 함께,
넓은 그물과 깊은 낚싯줄을 지닌 채
저 멀리 보이는 빛나는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64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65
6월 26일
26일. 그는 요란하게 지나가는 지하철을 바라보았다.
밑단을 접어올린 그의 청바지는
티셔츠 소매의 푸른 줄무늬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의 뒤통수 너머로도
지하철이 굉음을 내며 스쳐지나갔다.
엇갈린 두 지하철의 진동이
그의 손끝까지 미세하게 전해졌다.
그는 한 여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예상보다 더 아름답고,
더 단정하게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는 그녀가 옷을 꽤나 잘 입는다고,
옷이 그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검은 버버리 가방에
그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둘은 골목길을 걸었다.
그는 이런 아기자기한,
풀과 벽돌벽으로 가득한
골목길을 좋아했다.
하늘이 조금 흐리기는 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차분한 분위기가 그의 마음에 들었다.
고궁. 그는 기왓장에 흐르는 햇빛과
옅은 황토담에 진 그녀의 그림자가 좋았다.
적갈색 기둥 위의 검은 처마와
신발을 미끄러지게 하는
까끌거리는 모래 가득한 흙바닥이 좋았다.
살짝 낮은 문들과 살짝 높은 문턱이 좋았다.
함께 걸을 때,
그녀는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듯 했다.
눈을 잘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는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그녀가 좋은 청자가 되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 옅은 와인향이 둘을 감쌌다.
강물이 리드미컬하게 돌계단을 두드렸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곁에 앉는 빛나는 그녀와,
다리의 초록 조명이 반사돼
은은하게 빛나는 강물을 보았다.
볼이 붉게 물든 둘은 여름밤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한여름밤의 꿈 레퍼런스)
누구누구의 여름밤처럼
66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67
감각적 기억
그녀의 따스한 품에 안겨
그는 그의 지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부드럽게 까칠한 그녀의 겉옷이 그의 볼을 스치고
희미하게 넓은 샴푸향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어쩌면 샴푸가 아니라 향수일지도 모른다.
아득하게 불분명한 향기를 그는 한껏 끌어안았다.
그녀의 살에서는 산냄새가 난다.
새벽 내내 비가 퍼부은 뒤 개인 아침
습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면 나는
달콤하게 비린 풀내음이 배어있다.
68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69
미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즐기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합니다.
美를 아는 美人.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칵테일
잔잔하던 수면에 네가 한 방울 떨어져
나를 뒤흔들었다
70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71
찬란함
그대는 찬란한 사람이어서
비 내리는 푸른 들판인 것만 같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온 들판을 씻겨주는 여우비가 내리면
그대의 볼에는 아름다움의 눈물이 흐른다
72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73
바닷가에는 작은 마을이 있다
우리만 아는 작은 마을이 있다
검은 돌들에 흰 파도가 부딪히는 바다가 있는 곳
눈부신 햇살 아래 짙은 들판이 펼쳐지는 곳
네모난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집
잔잔한 열정들로 대화를 가득 매우고
우리는 바닷가를 따라 걷는다
우리만의 작은 마을을 걸어본다
제주
지나치다 보니 그 곳에는 길이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난
녹슨 바리케이드가 가로막은
그 곳에 그리운 오솔길이 있었다.
오솔길을 처음 발견한 날은
해가 질 듯한 어느 오후
고양이 두 마리와 눈이 마주친 날이었다
노란색과 검은색 페인트를 교대로 칠해둔
그 길을 지켜두었던 철 덩어리를 슬쩍 비껴서
나는 샛길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나지막한 햇살이
흙길을 마지막으로 비추더니
건물들 사이로 사라졌다
어느덧 주황색 털의 고양이가 일어나자
검은 고양이도 따라서 저 멀리 사라졌다
우거진 나무들을 따라서 나는 샛길을 걸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홀연히 앉아있는
세상에서 조금은 비껴나있는 샛길.
지나치다 보니
74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75
1
내가 시를 쓰게 된 것은
그걸 들어줄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독자이자 애인이다.
“나의 독자가 그립다.”
2
눈을 꼬옥 감고, 나는 한남동 거리를 떠올려.
행복하게 웃으며 지나가는 연인들과,
낮게 늘어진 집들이 즐비한 그 거리를.
내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 너를,
네 옆에서 웃고 있는 나를 떠올려.
4층짜리 높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푹신한 소파에서 책 읽는 여유를 떠올려.
어둑해지면 건물들의 벽돌 외벽을 밝히는
노란 조명과,
그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나무들을 떠올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나를 떠올려.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3
아까는 너랑 밤에 음악을 틀고 밖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게 생각났어.
올림픽 공원에서 재즈를 틀고 그 연못을 바라보던
여름 밤.
끈적이고 더웠지만, 벌레 소리로 가득한
그 특유의 분위기의 여름밤이 생각나.
신나서 춤추는 내 손에 마지못해 일어나
함께 음악을 듣던 그때가 그립다.
처음 우리집 앞 그 유수지에 가서
아스팔트에 앉아있던 날도,
얼마 전에 운동장 앞에 앉아있던 날도 말이야.
그 여유와 자유가 참 보고싶어.
4
나는 눈을 감고 여름의 해안을 떠올려.
펄럭이던 흰색 천막과 빛나던 백사장을.
태양 아래 윤슬로 반짝이던 바다를.
도망치듯 떠나간 푸른 바닷가에서
우리의 습한 여름밤과
뜨거운 해변을,
자작거리는 숯을
마주했어.
76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77
5
이곳의 경치는 나를 힘나게 해주는 큰 역할을 해줘.
가까이에는 이 곳의 경치와 사람들,
멀리서는 네가,
나에게 작고 큰 행복을 주며 시간을
서서히 흘려보내주고 있어.
이번 글은 여기서 이만 마칠게.
지금 8시 13분인데 30분에 너에게
전화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따 다시 편지 쓸게. 안녕.
사랑해.
78 나의 유일한 독자, 너에게 79
1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 속 인물
2 김영하 작가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속 인물
3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2023)"
4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
5 나짐 히크메트의 시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에 이어서 적었다.
47쪽 ©송새론
55쪽 ©Henry Matisse
외 ©장윤재
주석
삽화, 사진 출처
시선
1판 1쇄 발행 2023년 9월
지은이 장윤재
펴낸곳 SS Haus (더블에스 하우스)
출판등록 2023. 09.
서울특별시 강남구 잠실로 62 (05555)
대표전화 010-5691-2409
©
장윤재, 2023, printed in Seoul, Korea
ISBN 978-00-000-0000-0